하루 종일 페라리 타기는 아무리 자동차 기자라도 흔치 않은 경험이다. 특히 트랙까지 가져가 인스트럭터 뒤에서 ‘황제주행’을 하기란 페라리 오너라도 쉽지 않다. 며칠 전 운 좋게도 꿈만 같던 일이 벌어졌다. 이날 함께한 페라리는 F8 트리뷰토와 F8 스파이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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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8 트리뷰토(노랑)와 F8 스파이더(빨강)

F8은 360, F430, 458, 488의 계보를 잊는 페라리 8기통 미드십 라인업 최신 모델이다. 오늘날 많은 자동차 회사가 실린더 수와 배기량을 줄이는 대신 과급기를 붙이는 중이다. 출력과 연비를 비슷하거나 좀 더 나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동시에 각박해진 환경 기준까지 충족시키기 위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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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리터 V8 트윈터보 엔진

슈퍼카 브랜드, 페라리도 이런 시대적 흐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F8의 전작 488에 이르러 엔진 배기량을 기존 4.5L에서 3.9L로 줄이고, 트윈터보를 맞물렸으니까. 이러다 F1 머신 아닌 양산차에도 6기통 페라리를 도입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이쯤 되면, ‘차덕’들 입에서 조건반사처럼 나오는 걱정이 있다. 바로 터보레그와 감성. 하지만 페라리 V8 엔진이 어디 ‘그냥 엔진’이던가!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 연속 ‘올해의 엔진 및 파워트레인’ 대상을 수상한 엔진이다. 2019년에는 ‘베스트 퍼포먼스 엔진’을 비롯해 ‘650마력 이상’ 부문에서도 최고 점수를 받았다. 슈퍼카 엔진으로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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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올해의 엔진 및 파워트레인 대상

488에도 얹혔던 ‘F154’ 엔진은 전자식 웨이스트 게이트(터빈으로 가는 배출가스의 과도한 압력을 조절하는 밸브)를 적용하고, 소재(티타늄과 알로이) 경량화와 베어링 마찰 감소를 통해 터빈의 회전 관성을 줄였다. 모두 터보레그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감성은 어떻게 했냐고? 물론 터보를 얹은 탓에 레드존(엔진 회전한계)이 기존 458의 9,000rpm에서 1,000rpm 줄었다. 소리도 변성기를 거쳤다. 쭉쭉 뻗는 샤우팅을 자제하고 굵은 바리톤이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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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0rpm부터 시작하는 레드존

하지만 시승을 마친 지금 예상컨대, F8만 타보고 감성에 목마르긴 쉽지 않으리라. 엔진 회전한계는 낮아졌는데도 무려 8,000rpm에 이르고, 고르고 두터운 토크가 언제든 등을 떠민다. 박력 넘치는 엔진음은 운전자를 흥분시키기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12기통 페라리를 소유했었거나, 혹은 현재 가지고 있어서 수시로 돌아가며 타지 않는다면 감히 감성 타령은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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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변배기 플랩

여러분이 V8 엔진 얘기를 읽는 사이, 서킷에 들어설 순서가 됐다. 항상 출발선에 서 파란불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자면 긴장이 감돈다. 특히 오늘처럼 700마력 넘는 슈퍼카를 타고 있을 땐 더. 출력도 출력인데, 거기다 가격까지 생각하면 입술이 말라 온다.

앞선 인스트럭터의 차는 GTC4루쏘 T, 내가 탄 차는 F8 트리뷰토다. 두 차의 출력 차이는 110마력(F8 720마력 vs 루쏘T 610마력). 공차중량도 430kg(F8 1,435kg vs 루쏘 T 1,865kg)이나 다르다. 차의 성능만 놓고보면 F8이 GTC4루쏘 T를 ‘압살’하기 충분하지만, 운전자 실력까지 고려하면 결과는 정 반대가 될 터다. 그가 그동안 트랙에서 녹여낸 타이어 가루만 모아도, 내가 평생 쓸 타이어보다 많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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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가죽과 검정 카본, 노란 바늘땀이 어우러진 마감. '이탈리안 감성'의 올바른 예다

여느 행사와 같이 ‘마네티노’ 스위치는 ‘스포츠’로 설정했다. 다른 차들은 오른발에 힘 좀 주고 싶을 때 ‘스포츠’를 쓰지만, F8은 ‘스포츠’가 기본이다. 오른쪽으로 돌릴수록 ‘날 것’으로 변해가는 다이얼을 ‘레이스’ 이상으로 놓기엔 인스트럭터도 허락지 않거니와, 스스로도 겁난다. ‘나도 과연 전자장비 보호 없이 마음껏 트랙을 달릴 수 있는 날이 올까?’ 상상하던 중 파란 불이 들어왔다. 트랙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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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카를 표방하는 GTC4루쏘 T는 ‘컴포트’가 기본이지만, 스포츠카 F8은 ‘스포츠’가 기본이다. 당연하게도

먼저 워밍업 랩을 한 바퀴 돈 뒤,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간 다양한 기회를 통해 여러 번 인제 서킷을 탔지만, 손에 꼽힐 만큼 빠른 속도였다. 코너 몇을 통과한 뒤 바로 느낀 건, ‘역시 슈퍼카는 슈퍼카구나!’였다. 일단 동일한 노력으로 달리는 기본 속도가 보통 차들보다 훨씬 높다. 직선은 물론이고 코너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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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단 DCT의 기다란 고정식 시프트페들

일상에서 거의 경험하기 힘든 가감속과 조향을 반복 시도하다 보면, 초반엔 적응이 필요하다. 100~200마력대의 일반 승용차들과는 다른 차원의 슈퍼카를 몰고 있을 땐 말할 것도 없다. 무릇 적응 과정은 시험시간 옆 옆줄 1등 친구 답안지 보는 것 이상의 집중을 요하며, 간혹 감독 선생님과 눈 마주친 수준의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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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킷으로 가는 길

재미있는 건, F8 트리뷰토의 출력이 평소 타던 차들보다 몇 배 강력하더라도 공포는 같은 비율로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힘이 세진만큼 제동력과 하체 안정성, 전자장비의 정밀도 역시 함께 올라가기에 공포 대신 재미를 느낄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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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을 때는 물론 터널 어둠 속에서도 넉 놓고 보게 된다

F8 트리뷰토는 평소보다 과하게 코너를 진입해도 언더스티어 없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틀었고, 엉덩이는 의연하게 앞바퀴 궤적을 따라 물고 늘어졌다. 처음에 GTC4루쏘 T와 F8 스파이더를 따라 세 번째로 달렸는데, 뒤에서 본 앞선 두 차의 거동도 생각보다 차이가 컸다. 좌우 기울어짐 없이 노면에 착 붙어 코너를 날카롭게 잘라먹는 건 확실히 F8 스파이더였다. 같은 페라리 라인업 사이에도 각각의 성격이 드러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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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요리를 위한 날개들

진입은 앞서 달리는 인스트럭터만 잘 따라가도 크게 실수할 일 없었다. 문제는 탈출이다. 운전대가 충분히 똑바로 풀리지 않았거나, 차가 횡가속을 받는 상태에서 지나친 가속페달 조작은 여지없이 전자장비 개입으로 이어지기 마련. 이때 차는 미끄러짐을 막기위해 스스로 제동을 걸고 엔진 힘을 옭아매는 데, 이 과정이 브랜드의 철학이나 기술력에 따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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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8 스파이더의 뒤태

F8의 전자장비는 가장 개입이 많은 스포츠 모드에서도 참 ‘츤데레’같았다. 워낙 높은 기본기 덕분에 일찌감치 개입할 필요도 없거니와, 개입을 하더라도 언제 도와줬는지 모를 정도만 정확히 쓱 들어왔다 빠진다. ‘너 이러다 큰일 난다!’며 꾸지람하듯 훅 참견하지 않으니, 운전자는 달리던 흐름과 재미를 끊김 없이 자연스레 이어갈 수 있다. 이런 절묘함이야말로 페라리가 설립 이후 줄곧 모터스포츠에서 싸우며 얻은 결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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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꾹 눌러주는 S-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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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멋으로 뚫은 바람길은 없다

아, 단점도 있다. 운전자가 본인의 운전실력을 과대평가할 수 있다는 거다. 자기 실력을 적나라하게 알고 싶다면, 마네티노 스위치를 ‘CT-OFF’ 혹은 ‘ESC OFF’까지 돌려보자. 갑자기 앞유리 속 풍경이 빙글빙글 돌고, 저 멀리 펜스가 좀비보다 빨리 다가와도 책임은 못 진다. 물론 오버스티어 요리 실력이 ‘셰프급’이라면 자동차로 가능한 최고의 손맛을 느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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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8 스파이더 (사진: 온갖차 한명륜 기자)

마지막 코너가 끝나면 640m 직선구간이 펼쳐진다. F8 트리뷰토의 720마력을 끝까지 뽑아낼 수 있는 곳이다. 전작 488 GTB 대비 50마력 높아진 최고출력과 40kg 줄어든 무게 따위를 체감할 순 없겠으나, 일단 밟아보자.

오른발을 끝까지 짖이기자, 무섭게 속도를 높인다. 순식간에 다가온 브레이킹 포인트와 연이은 내리막은 나 같은 ‘쫄보’에게 속도계 볼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겨우 확인한 최고속도는 시속 220km. 내가 가속페달을 일찍 떼어서 그렇지, 선수들이었다면 좀 더 빠른 속도도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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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8 트리뷰토 (사진: 온갖차 한명륜 기자)

사실 가속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감속이다. 인제 서킷 1번 코너는 고속 직선 후 크게 우측으로 휘어진 내리막이 나오고, 16번 코너는 급격한 내리막에 헤어핀 오르막이 붙어있다. 둘 다 브레이크가 시원치 않은 차들은 비틀거리다 트랙을 벗어나기 일쑤인 곳이거늘, F8 트리뷰토는 정확히 내가 원하는 만큼 안정적으로 속도를 뚝 떨궜다. 그것도 거의 지치는 기색 없이 행사 내내. 괜히 앞 398mm, 뒤 360mm의 카본 세라믹 디스크에 앞 6피스톤, 뒤 4피스톤 캘리퍼를 끼운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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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상 왼발 공간이 좁지만, 그래서 더 레이스카스럽다

트랙 주행을 마치고, 인스트럭터에게 물었다. 페라리 오너 대상 행사에서도 방금 정도 흐름으로 달리는지. 대답은 의외였다. “이렇게 세게 달리진 않아요” 하긴, 차 값도 그렇고 성능도 그렇고, 아무리 오너여도 자기 페라리를 마구 다루기가 쉽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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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동원된 F8 트리뷰토엔 값비싼 선택사양이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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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기 색상 조합과 다양한 카본 파츠가 특별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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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카본휠은 가격이 안드로메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이번엔 F8 스파이더에 앉았다. 인제 스피디움을 나서며 ‘뚜따’를 ‘거행’했다. 평소 오픈 에어링에 대한 로망을 품고 있었고, 게다가 지금 타고 있는 차가 F8 스파이더라면 흡사 성스러운 의식과 같다. 천천히(시속 45km 이하) 달리는 중에는 세우지 않고도 14초 만에 지붕을 열 수 있다. 주변에 신기하게 봐줄 행인이 아무도 없어서 아쉬웠다면, 나는 ‘관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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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돌아오는 길, 출발에 앞서 고급유를 든든히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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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히 들여다 보이는 F8 트리뷰토의 엔진룸이 부럽다가도, ‘뚜따’ 후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을 보면 싹 가신다

따스한 햇살과, 청량한 가을바람이 정수리를 간지럽힌다. 그래, 이게 바로 스파이더의 참맛이지! 나와 뒷바퀴 사이 웅크린 엔진은 감춰진 힘을 암시하듯 오른발에 맞춰 웅장하지만 작게 고른 숨을 내쉰다. 엉덩이는 도로를 스치듯 미끄러지고, 단단하되 유연하고 묵직한 하체가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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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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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미러에 비친 펜더 볼륨과 흡기구는 내가 특별한 차에 타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오전에 몰고 왔던 GTC4루쏘 T는 물론이고, 예전에 몰아봤던 812 슈퍼패스트도 그렇고, 이날 탔던 F8까지도 우려보다 편안한 승차감을 보였다. 큰 휠에 납작한 타이어(앞 245/35ZR20, 뒤 305/30ZR20), 단단한 하체와 얇은 시트 모두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정도라면 그런대로 일상 주행까지 가능하겠다. 못생긴 과속방지턱과 던전 입구를 닮은 지하주차장은 조심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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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카 주제에(?) 서라운드뷰도 제공한다. 대신 '카툭튀' 사이드미러를 참아야한다. 디스플레이는 해당 차 색깔도 반영한다

조심할 게 하나 더 있다. 워낙 순항 속도가 높아 자칫하면 고속도로 제한속도를 넘기기 일쑤다. 속도계상으로도 시속 110km가 1/3밖에 되지 않는다. 천천히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며 잠깐 딴생각하다간 집으로 ‘행운의 편지’가 수시로 날아올 수 있다.

길가 건물 통유리에 비친 빨간 F8 스파이더, 그리고 그걸 몰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 헤어진 옛 여자친구를 만나러 간다면 다시 받아줄까? 영화 아바타에서 토르크 막토가 된 제이크 설리의 기분이 이랬을까? F8 스파이더 오너들은 탈 때마다 설렐까?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고, F8 스파이더에서 본 노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I Can Do This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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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8을 타고있으니 앞에 선 포르쉐가 부럽지도, 막히는 길이 지루하지도(?) 않았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