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t
PWRS 2020

2016년 어느 날, 하루 종일 포르쉐를 실컷 타볼 수 있다는 ‘포르쉐 월드 로드쇼(Porsche World Roadshow, 이하 PWRS)’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심장이 뛰고, 목이 타더라. 반드시 가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아무나 신청하면 갈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먼저 초청장을 구해야 했다. 없는 인맥, 있는 인맥 모두 동원해 겨우 손에 넣었다. 다음 문제는 돈. 참가비 80만 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이체’를 클릭한 건 마우스 포인터가 모니터를 수십여 분 배회한 후다.

alt
PWRS 2016
alt
PWRS 2016에서 만난 911(991) 터보 S
alt
PWRS 2016에서 만난 911(991) 카레라 S

그래서 어땠냐고? 초청장을 ‘영끌’로 구하고, ‘거금’ 들인 가치가 있었냐고? 수년이 흐른 2020년, PWRS를 초대받아서 가기까지 줄곧 자랑하고 다녔다는 사실로 대답을 대신한다. 이번엔 올해 다녀온 PWRS 얘기를 풀어볼까 한다.

alt
PWRS 2020

PWRS 2020은 총 4개의 세션으로 구성됐다. 본격 시작에 앞서 올해 PWRS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타이칸 공개와 올바른 운전자세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운전자세 얘기를 하니, 갑자기 떠오른 기억 하나. 얼마 전 911을 타다 BMW M2에 바로 옮겨 앉은 적이 있다. 평소 M2는 물론이고 내 차(118d)도 시트포지션이 낮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아니더라. 결론은, 포르쉐를 탈 땐 가능한 낮춰서 앉자. (읭?)

alt
PWRS 2020의 주인공, 타이칸
alt
맑은 날씨 사진은 전부 다른 날 찍었다 ㅜㅜ

타이칸은 작년 9월 공개된 순수 전기 세단이다. 너도나도 전기차에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한 지 몇 해가 지났으니 데뷔가 살짝 늦은 감이 있지만, 그간 포르쉐의 행보로 봤을 때 ‘조금 늦어도 제대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결과가 아닐까?

타이칸의 가장 큰 특징은 업계 최초로 적용한 800V시스템. 일반적인 전기차들의 400V에 비하면 두 배 전압을 쓰는 셈이다. 덕분에 뛰어난 모터 효율과 가늘어진 전선을 통한 경량화를 챙겼다. 업계 평균을 훌쩍 넘는 270kW 급속 충전 능력도 자랑이다. 이 경우, 22분 30초 만에 5% 남은 배터리를 80%까지 채울 수 있다.

디자인은 사진을 보며 살펴보자. 주행성능은 잠시 후 트랙에서 알아볼 예정이다.

alt
‘나는 전기차다!’ 와 ‘나는 전기차일까요?’의 중간을 겨냥했다. 어딘가 2세대가 더 기다려지는 외모다
alt
파나메라보다 살짝 작은 크기. 86mm 짧고 42mm 낮다. 살짝 껑충해 보이는 건 3챔버 에어서스펜션을 위로 올려 둔 탓이다
alt
포르쉐를 상징하는 4포인트 주간주행등은 방향지시등을 겸한다
alt
전기모터 앞으로 81L의 수납공간을 마련했다
alt
범퍼 흡기구는 에어커튼을 여닫아 냉각과 공기저항 감소를 조절한다, 타이칸의 공기저항 계수는 0.22Cd에 불과하다
alt
왼쪽은 완속, 오른쪽은 급속 충전구를 마련했다
alt
911(992)처럼 팝업식 도어핸들을 적용해 차체의 매끈함을 지켰다
alt
21인치 Mission E 디자인 휠
alt
빵빵한 리어펜더
alt
신세대 포르쉐답게 엉덩이에 붉은 광선검을 달았고, 그 아래는 투명 커버 안으로 ‘PORSCHE’를 양각으로 새겼다
alt
뒤 트렁크 용량은 366L
alt
운전석 시트포지션도 911보다 조금 높은 수준. 포르쉐다움과 배터리 위치, 멋과 실용성 사이에서 최적의 패키징을 위해 얼마나 고민했을지 짐작되는 부분이다
alt
곡면 디스플레이가 타이칸의 실내에 ‘첨단’ 느낌을 두 방울을 더한다, 포르쉐답게 시동 아니 ‘전원’ 버튼이 운전대 좌측에 자리했다

 alt

alt
공조장치를 비롯한 거의 모든 기능은 터치 방식으로 조작한다. 아래 빈 공간은 상단 디스플레이를 조작하는 터치패드
alt
머리공간은 밖에서 보기보다 한결 여유롭다. 911과 별 차이가 없을 만큼 날렵하게 떨어지는 루프라인을 보면 짐작하기 힘들 정도

내가 가장 처음 참여한 세션은 포르쉐의 4도어 모델을 경험하는 순서. 카이엔 터보 S와 카이엔 터보, 파나메라 GTS 스포츠 투리스모 등을 몰았다. 포르쉐에 편안함과 실용성을 담은 모델들이다. 막내 SUV, 마칸은 포르쉐 라인업 중 가장 판매량이 많고, 포르쉐에 가장 큰 돈다발을 쥐여주는 효자라고.

과거 2016년, 카이엔을 트랙에서 처음 타보고 생각했었다. ‘무슨 SUV가 이래?’ 큰 덩치와 육중한 무게로 코너를 날카롭게 잘라먹었으니까. 이번에 다시금 카이엔 쿠페를 몰며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SUV도 포르쉐가 만들면 이랬지!’

alt
카이엔 터보 쿠페
alt
549마력짜리 엉덩이

파나메라 스포츠 투리스모는 파나메라의 왜건 버전이다. 카이엔과 카이엔 쿠페가 그랬듯, 파나메라와 파나메라 스포츠 투리스모의 운동성능도 잠깐 타보고는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웅장한 배기음과 묵직한 하체, 칼 같은 핸들링이 ‘포르쉐 감성’을 물씬 풍긴다.

alt
파나메라 스포츠 투리스모

자동차 기자들 중 특이한 차 좋아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은데, 그들 중 많은 수가 파나메라 스포츠 투리스모를 드림카로 꼽더라. 운동성능이야 포르쉐의 일원이니 말할 필요 없고, 거기에 우리나라가 ‘왜건의 무덤’인 탓에 국내 정식 수입도 안되는 ‘초레어탬’이니 그들의 드림카가 될 자질을 다 갖췄다.

alt
카이엔 터보 S E-하이브리드 쿠페
alt
680마력짜리 엉덩이

두 번째 세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타이칸을 타볼 차례다. 2015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타이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미션-E’ 컨셉트카가 처음 공개되고, 실제 양산으로 이어져 직접 운전대를 잡기까지 5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종류의 전기차를 타봤지만, 포르쉐가 만들었다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alt
2015년 등장한 미션 E 컨셉트카

우선 0-100km/h 체험이다. 제원상 타이칸 터보 S의 소위 ‘제로백’은 2.8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4초 대면 ‘우와!’ 했었는데, 어느샌가 3초대로 줄더니 이제는 2초대는 돼야 슈퍼카 세상에서 명함을 내미는 시대가 됐다. 이제는 돈만 있으면, 그리고 4인승 세단으로도 ‘가공할’ 가속을 일반도로에서 즐길 수 있단 말이다.

alt
타이칸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았다. 차 속에 깊숙이 들어앉는 시트, 굴곡지고 딱딱한 운전대가 포르쉐답다. 과정은 간단하다. 출발선에 서, 가속페달과 브레이크페달을 동시에 밟은 뒤 왼발을 들면 된다. 하나, 둘, 발사!

‘위이이이잉~’ 끝났다. 싱겁다. 시속 100km를 무슨 찬물에 밥 말아먹듯 해치운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맹렬한 가운데 조용한 우주선 소리만 들리니 더 비현실적이다. 한창 속도를 올리는 사이, 계기반 왼쪽 원에 그려지는 중력가속도 정보는 약 0.9G를 찍는다. 어지간한 슈퍼카 수준이다. 인스트럭터에 따르면, 비만 오지 않았어도 1G 이상 가능하단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타이칸을 타고 트랙에 들어설...... 순간인데...... 하, 비가 온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침부터 내리긴 했지만, 왜 하필 지금 이렇게 쏟아지냔 말이다! 마침 타이칸 트랙 주행을 담당하는 인스트럭터 무전기가 울린다. 폭우로 인해 행사 일시 중단을 고려 중이라고. 인스터럭터들도 안전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순서를 기다리며 잠시 걱정했지만, 다행히 행사는 이어졌다. 대신 속도를 늦추고, 거리는 줄일 수밖에. 와이퍼를 가장 빨리 작동해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아쉽다기보다 감사했다.

이 와중에 트랙을 타면서 느낀 건 타이칸의 밸런스다. 기본기 부족한 차들은 폭우 속에서 운전자에게도 불안감을 전하기 마련. 625마력(오버부스트 사용 시 761마력), 107.1kgm, 2.3톤의 타이칸은 폭우 속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달렸다. 심지어 PSM(Porsche Stability Management, 포르쉐의 전자식 주행 안정 장비)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비 오는 날 매끄러운 트랙에선 살짝만 과하게 몰아도 바로 전자장비가 개입하며 브레이크를 잡거나, 가속을 옭아맨다.

alt
위: 회생제동장치 개입 설정 / 아래: '위이잉~' 또는 조용~ 설정

트랙 중간, 고깔 사이로 휙휙 빠져나가는 구간도 쉽기만 하다. 빠르지 않은 속도를 감안해도, 롤링 없이 매우 깔끔하게 처리했다. 유격 없는 스티어링, 파나메라에서 물려받은 든든한 하체, 차체 바닥에 깔린 배터리의 무게중심이 만든 결과다.

다음 세션은 2도어 모델을 탈 차례다. 911과 718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포르쉐 다운, 제일 순수한 모델들이 아니던가! 911 카레라 S는 시승차를 통해 만나본 터라, 좀 더 반갑고 익숙했다. 카레라 S를 먼저 타고 연이어 카레라로 옮겨 앉았다. 주행모드는 둘 다 ‘스포츠’로 맞췄다.

이날 새롭게 느낀 점은 911 카레라와의 차이다. 트랙에 들어서 코너 몇 개를 돌고 나니 카레라가 카레라 S보다 한결 순하다. 가속페달 반응도, 치고 나가는 펀치력도 카레라 S가 더 맵다. 카레라만 타봤다면 이 정도도 충분히 과격하고 역동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카레라 S를 맛보고 나니 차이를 알겠더라.

alt
스포츠 디자인 패키지가 적용된 911 카레라
alt
스포츠 디자인 패키지는 앞 범퍼 하단 립스포일러가 차체 컬러고, 흡기구도 활짝 열린 채 고정돼 있다
alt
스포츠 디자인 패키지는 범퍼 하단 좌우로 ‘L’ 모양 차체 컬러가 추가됐다
alt
현 세대 911(992)부터는 후륜구동과 4륜구동의 폭이 같다. 대신 엔진룸을 덮은 세로 그릴이 4륜구동은 크롬(위), 후륜구동은 검정(아래)이다. 그릴의 수도 좌우 9줄, 가운데 보조제동등이 2줄. 즉, 9+1+1=911 혹은 992(코드네임)를 뜻한다

마지막 세션은 가감속과 슬라럼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가감속은 최강 911로 불리는 911 터보 S를, 슬라럼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718 박스터 T를 타고 진행됐다.

먼저 911 터보 S의 제원을 보자. 3.8리터 박서 엔진에 트윈터보를 묶어 650마력, 81.6kgm를 발휘하며, 변속기는 8단 PDK를 맞물렸다. 0-100km/h는 2.7초, 최고속도는 330km/h다. 아까 타이칸의 2.8초도 웃음 나오는 수준이었는데, 911 터보 S는 0.1초 더 빠르다. 혼자 생각했다. ‘혹시 이건 911 터보 S의 상징성 또는 하극상 방지를 위한 의도적 차이가 아닐까?’

alt
최강 911(992) 터보 S

아까 타이칸을 제대로 타지 못하게 만들었던 비는 아직 꼬장을 다 멈추지 않았다. 노면이 미끄러워 인스트럭터가 모는 차를 옆에 동승해야만 했으니까. 그럼에도 911 터보 S가 보여준 폭발력은 충분히 놀라웠다. 타이칸엔 없던 절절 끓는 엔진음이 더해지며, 뒤에서 다른 차가 들이받는 듯한 ‘충격’을 선사했다.

alt
발사 준비
alt
발사

더 대단한 건 이 ‘짓’을 하루 종일 해도 전혀 문제없는 내구성이다. 다른 차들이 런치컨트롤에 일정 횟수 제한과 휴식시간을 두는 것과 다르다. 이건 마치 인터벌 트레이닝을 남들 다 나가떨어진 후에도 계속하는 꼴이다. 다른 경쟁 브랜드에게는 참 얄미운 존재겠다.

alt
410mm에 이르는 앞 브레이크 디스크. 멈출 수 있는 자만이 달릴 수 있다

슬라럼은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콘 사이를 지그재그로 통과하는 테스트다. 급가속, 급선회, 급제동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자동차의 종합 성능과 운전자의 실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곤 한다.

포르쉐가 슬라럼을 위해 준비한 차는 718 박스터 T다. 일반 718 박스터와 거의 모든 제원은 동일하다. 2리터 4기통 수평대향 엔진으로 300마력, 38.75kgm를 낸다. 변속기도 7단 PDK로 같다. 가장 큰 차이는 기계식 LSD(Limited Slip Differential)가 포함된 PTV(Prosche Torque Vectoring)과 20mm 낮아진 PASM(Porsche Active Suspension Management)이다. 코너링 시 무게중심은 낮추고, 단단한 하체로 뒤뚱거림을 억제하며, 엔진 힘을 온전히 뒷바퀴에 실어 보내기 위한 조치들이다.

우리 조는 전부 10명. 각자 3번을 달려 가장 좋은 기록으로 순위를 매긴단다. 일정 막바지, 쌓여가던 피로가 사라지고 갑자기 전의가 샘솟는다. 이게 뭐라고……

첫 번째 랩을 강병휘 인스트럭터와 함께 달린 뒤, 오히려 지금보다 80% 정도로 달리는 게 기록을 단축시킬 수 있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그런데도 다음 랩은 마지막 정지선 초과. ‘너무 흥분했나?’ 결국 다행히 1등을 했지만, 밝히기도 민망하다. 이 세상에 운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동안 행사장 다니며 여러 번 슬라럼을 해봤지만, 718 박스터 T의 몸놀림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엔진을 차체 중앙에 낮게 품은 덕에, 앞머리가 민첩하게 콘을 파고들었고 뒤따르는 차체는 팽이처럼 방향을 틀었다.

아, 아직 한 세션이 더 남았다. 바로 택시타임이다. 오늘 행사 진행을 도와준 인스트럭터(현역 레이서)들이 운전하는 포르쉐를 타고, 용인 서킷을 달리는 시간이다. 내가 기자가 되고 절실히 깨달은 사실 중 하나가 ‘선수는 괜히 선수가 아니구나’다. 밖에서 운전 좀 한다는 사람들도 선수들 실력을 옆자리에서 보고 나면 열에 아홉은 겸손해질걸?

alt
최지웅 인스트럭터. 현역 드리프트 선수로 활동 중이다

내가 탄 차는 파나메라 스포츠 투리스모, 운전대를 잡은 인스트럭터는 최지웅 드리프트 선수다. 그는 아직 흥건한 트랙을 과감하게 질주했다. 중간중간 코너에서 화려한 드리프트를 선보여 주었고, 이 차가 아까 내가 탔던 그 차가 맞나 싶었으며, 정교한 조작 중에도 우리와 여유롭게 대화 나누는 그가 신기해 보였다. 나도 얼마 전 BMW 드라이빙센터에서 교육받은 드리프트를 꼭 더욱 갈고닦아 보리라 다짐했다.

alt
드리프트하는 타이칸

PWRS 2020이 끝났다. 올해 PWRS를 위해 독일에서 한국을 찾은 포르쉐는 총 26대. 이들을 골고루 온종일 트랙에서 타 볼 수 있는 PWRS는 ‘포르쉐 바이러스’ 전파를 위한 베이스캠프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막지 못한 포르쉐 바이러스의 위력은 올해도 강력했다.

결론은 이거다. “포르쉐는 뭘 타도 포르쉐다!” 911은 당연하고, 로드스터 박스터를 타도, 세단 파나메라를 타도, SUV 카이엔을 타도, 심지어 전기차 타이칸을 타도 포르쉐는 포르쉐였다. 어쩌면 리어카도 포르쉐가 만들면 빠를 것만 같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