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국에?’

저 아래 줄줄이 달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댓글임과 동시에, 내가 토요타 시에나 시승을 앞두고 족히 20번은 되뇌었던 생각이다. 단지 일본제품 불매운동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신형 4세대 시에나가 공개된 마당에, 2009년 첫 공개된 현역 3세대 시에나(2017년 페이스리프트를 거쳤다)가 얼마나 경쟁력 있을지도 의아했다.

얼마 전 토요타가 오랜만에 시승행사를 열었다. 배정받은 차는 시에나. 기아 카니발, 혼다 오디세이 등과 경쟁하는 미니밴이다. 자동차 세상의 균형이 SUV로 완전히 넘어가버린 요즘, 미니밴의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게다가 시에나는 국내 데뷔 9년 차를 맞았으니, ‘구형 티’를 피할 수 없다. 여기에 ‘노재팬’ 장기화까지 결정타를 날렸다. ‘이 시국에’ 만나본 시에나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시승차를 건네받고 바로 도로에 나섰다. 운전자세는 높지막하고, 보닛은 짧은데 사이드미러 뒤로 차체가 길다. 그간 자주 접했던 세단이나 SUV, 쿠페들과 다른 감각이라 잠깐 어색하다. 어지간한 대형 SUV 못지않은 덩치(길이 5095mm, 너비 1985mm, 높이 1805mm)도 처음엔 부담스럽다. 다행히 적응은 쉽다. 남녀노소 누구나 일상 속에서 편하게 몰기 위한 차니만큼 금방 몸에 익는다. 탁 트인 전방 시야와 편안한 운전 자세, 넉넉한 크기의 사이드미러 덕분이다.

달리기도 자연스럽다. 엔진은 3.5리터 V6 자연흡기 가솔린, 변속기는 8단 자동을 품었다. 요즘 다운사이징 터보와 하이브리드, 전기차가 저마다 장점을 내세우고, CVT(무단 변속기)와 DCT(듀얼 클러치 변속기)가 최상의 궁합을 뽐내지만, 간혹 설익은 완성도와 낯선 감각에 당황할 때도 있다. 시에나의 무르익은 파워트레인은 대단한 효율이나 번개 같은 변속 대신 익숙함과 무난함을 챙겼다. 이 경우 구관이 좋은 건 명관이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보통 이상이라는 믿음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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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분사와 간접분사를 결합한 3.5리터 V6 D-4S 가솔린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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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단 자동변속기는 요즘 잘 쓰지 않는 스텝게이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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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 2중접합차음유리

301마력, 36.4kgm의 힘은 2175kg(공차중량)의 시에나를 부족함 없이 이끈다. 8단 자동변속기도 부드럽게 엔진 회전수를 쪼개어 이질감 없이 바퀴로 전달한다. 가속은 시원시원하고, 그 와중에 가솔린 6기통의 매끈하고 풍성한 엔진음이 귀를 즐겁게 한다. 이 정도 소리라면 미니밴이라고 마냥 엔진음을 꽁꽁 틀어막을 필요는 없을 듯.

한편 신형 4세대 시에나는 전 트림에 걸쳐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기본으로 얹었다. 첫째도 둘째도 효율을 외치는 2.5리터 4기통 엔진에 초반 토크 보강과 효율 향상을 위한 전기모터를 맞물려 200마력 중반을 발휘한다. 연료는 조금 먹으면서, 비슷한 힘을 내고, 동시에 배출가스까지 깨끗해야 하는 요즘이기에 당연한 변화다. 게다가 하이브리드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토요타로선 더욱. 결국 감성과 효율을 맞바꾼 셈이지만 L당 4km(미국 기준) 이상 나은 연비를 보인다고 하니, 조금 주고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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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를 앞둔 4세대 시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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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를 앞둔 4세대 시에나

시에나는 미니밴에 잘 쓰지 않는 AWD(All Wheel-Drive) 시스템을 얹었다. ‘SUV도 아니고 미니밴에 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SUV 탄다고 꼭 험로를 가는 것도 아니고, AWD가 SUV만 필요한 것도 아니니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눈길, 진흙길에서 AWD의 효과를 보고 나면 감사하게 될 터. 급가속이나 미끄러운 길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힘은 앞바퀴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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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션빔 후륜 서스펜션 뒤로 AWD를 위한 드라이브 샤프트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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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구동력은 앞바퀴로 보낸다

시에나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얘기지만, 승차감도 푹신푹신하다. 어느 자리에 앉더라도 부드러운 하체가 노면의 충격을 걸러 편안한 여행을 돕는다. 브레이크 페달 답력도 마찬가지. 쑥쑥 밟히고 부드럽게 속도를 줄인다. 살랑살랑 봄바람처럼 달리기 위한 차가 민감하게 움찔대면 그만큼 승객들 고개가 심하게 까딱일 테니까.

한적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찬찬히 실내를 살폈다. 어찌 보면 시에나에게는 지금부터가 진짜 전공 분야요, 장기자랑 시간이다. 달리고, 돌고, 서는 게 자동차의 본분이라면, 실내공간은 미니밴의 기본 덕목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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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 센터페시아 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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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열 컵홀더와 수납공간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수납공간이다. 운전대 좌측, 대시보드 상단, 센터페시아 하단, 그리고 서랍처럼 생긴 센터콘솔 서랍까지...... 팔 수 있는 곳은 다 팠다. 10개의 컵홀더는 음료 파티라도 열 분위기다. 가족들과 여행 중엔 여러모로 편하겠으나, 혹시 자잘한 잡동사니들 무심코 쑤셔두다간 나중에 어디 있는지 찾기도 힘들겠다.

2열 독립식 시트는 시에나의 주요 자랑거리다. 시트 바깥쪽 아래 레버를 당기면 종아리 받침이 펼쳐지는, 이른바 ‘오토만’ 시트다. 원래 오토만은 등받이가 없고, 보통 소파와 함께 자리하며 발을 기대는 용도의 작은 의자를 말한다. 3열에 아무도 타지 않은 상황이라면 거의 눕다시피 앉을 수 있다. 한껏 뒤로 민 다음 등받이 젖히고 종아리 받침까지 올리면 거실 안마의자가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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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열 오토만 독립시트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3열은 공간도 편의장비도 옹색하기 마련. 시에나의 3열은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쓸만한 공간을 보여줬다. 마음에 들었던 건 등받이 각도다. 3열 주제에 본격적으로 상체를 기댈 수 있는 수준. 2열 시트를 앞으로 반만 밀면 무릎 공간도 넉넉하다. 자리마다 2개씩 자리한 컵홀더를 비롯해 수납공간, 그 안에 자리한 USB 포트, 천장 송풍구, 그리고 햇빛가리개까지, 3열에 앉아도 1, 2열 부러울 게 딱히 없다.

아직 끝이 아니다. 3열 뒤로도 널찍한 적재공간이 남았다. 3열 시트 웅크렸던 곳의 깊이가 족욕도 가능한 수준이라 키 큰 짐을 싣거나 물건 굴러다니지 않도록 하기 딱이다. 3열 시트 등받이 뒤에 무려 6개나 달린 쇼핑백 걸이를 보니, ‘장보기 머신’으로 불러도 되겠다.

1, 2열에 4명이 나눠 앉았다면, 3열 시트는 바닥으로 감쪽같이 접어 넣자. 평평한 바닥과 고시원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방’이 나온다. 심지어 이보다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면 2열 시트를 아예 떼버릴 수도 있다. 사람을 많이 태우던, 짐을 잔뜩 싣던, 사람과 짐을 골고루 나르던, 다 품어줄 기세다. SUV 인기가 제아무리 높다지만, 역시 이런 공간 활용 능력은 미니밴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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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열 시트를 앞으로 밀고, 3열 시트를 접으면 평평하고 넓은 적재공간이 짠!

자, 이제 미간 찌푸렸던 곳을 얘기해볼까? 대부분 시승 전 걱정했던 세월의 흔적과 연관 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건 헤드램프다. 온갖 조명 기술로 저마다 화려함을 뽐내는 요즘, 시에나의 수수한 할로겐 헤드램프는 오히려 돋보인다. 리어램프도 마찬가지.

실내 상황도 다르지 않다. 아날로그 원형 계기반 사이에 조그맣게 자리한 LCD와 조악한 후방카메라 화질, 왼발로 밟아서 작동하는 주차 브레이크가 시대와 동떨어졌다. 미국 시장을 주 무대로 하는 일본 대중 브랜드 차들이 대체로 이렇게 첨단과 거리가 멀고, 시에나도 예외가 아니다. ‘차는 OOO?’을 문제로 내면 ‘풀옵션’을 써넣고, 본인 신분과 차를 동일시하며, 최신 IT 제품을 누구보다 먼저 사서 SNS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나라에선 분명 치명적인 흠이다.

‘이 시국에’ 만나본 시에나는 장단점이 뚜렷했다. 6기통 엔진이 전해주는 풍성한 감성과 무난한 주행성능이 만족스러웠고, 무엇보다 테트리스급 수납과 공간 활용 능력이 제일 기억에 남았다. 반면, 감출 수 없는 나이는 아쉬움이 컸다. 새 차를 사고도 중고차를 산 듯 착각할 정도.

며칠 전 기아차가 신형 4세대 카니발을 공개했다. 세련된 디자인과 각종 편의장비가 어울려 역시 신차 다운 매력이 물씬하더라. 그럼에도 공간 활용성은 여전히 시에나가 더 나아 보여 놀라웠다. 노병은 죽지않았고, 다만 안 팔릴 뿐이었다.

노재팬을 지지하지만, 국내서 카니발 혼자 독주하는 걸 결코 올바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없다. 경쟁자가 있고 서로 다투며 상품성을 높여갈 때, 발전하며 뒤처지지 않는다. 국내 노재팬 상황과 아직 신형 시에나가 팔리지 않는 점을 고려했을 때, 카니발(미국명: 세도나)과 시에나의 진짜 전쟁터는 향후 두 모델 다 신형이 출시된 북미시장이 될 듯하다. 그때 그곳에서 둘은 과연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게 될지 궁금하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