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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류장헌) 밤에 봐야 더 예쁜 체로키?

무한한 신뢰까지는 아닐지라도 마음속 어딘가 똬리를 튼 믿음 같은 게 있다. 시험 전날 9시에 잠들어도 다음날 아는 문제가 나올 거 같다는 믿음,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리젠트 컷을 하고 나갔을 때 사람들이 쳐다보는 건 트렌드 세터로서 멋스러운 시선이란 믿음 같은 것들 말이다. 맞다. 얼토당토않은 믿음이자 허무맹랑한 자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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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류장헌) 지프의 상징 7슬롯, 조금 더 꾸밀 순 없었나?

자동차를 탈 때도 그런 믿음이 있다. 깊게 패인 웅덩이 앞에서 ‘이 정도는 가뿐히 넘어갈 거야.’라던가? 무자비하게 나열된 돌덩이와 단정치 못한 흙길에서 ‘이 정도 길이면 양탄자 수준이지.’ 같은 막연한 믿음, 대부분 그런 믿음은 보기 좋게 박살이 난다. 레커차를 불러 빠져나와야 했고 때론 삽을 들고 열심히 땅을 파내기도 했다. 믿음과 배신 사이에서 조용히 한구석 자리를 차지한 브랜드가 있으니, 그게 지프다. 어떤 길을 가던 내 길을 만들어 줄 거란 막연한 믿음은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잠들어있던 뇌세포에 숨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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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류장헌) 배신하지 않을 조합 ‘JEEP와 TRAIL RATED’

최근 지프 라인업은 랭글러를 제외하면 오프로드 성향보단 온로드에 치중했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체로키 옆구리에 ‘TRAIL RATED’ 배지가 붙은 모습에 발길은 연천으로 향한다. 청량한 하늘과 시원한 바람, 코 끝을 자극하는 자연 향기가 가득한 곳, 그곳은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아우르는 천연 코스가 즐비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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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 호크는 아스팔트가 없는 곳에서 빛을 발한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헤드램프와 어색한 7슬롯의 조합, 더불어 어설프게 깎인 프런트 범퍼 라인은 얄궂은 믿음을 심는다. 생긴 건 저래도 제 할 일은 잘할 거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랄까? 어지간한 높이의 턱은 시크하게 넘어갈 듯한 외모잖아. 여기에 차체 하부를 보호해 주는 스키드 플레이트가 장착돼 나름 근거 있는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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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로키에 앉아 물을 만나면 동심이 찾아든다

태양을 반사하며 빼곡히 들어찬 모래와 자갈밭, 드라이브 모드를 슬며시 SAND/MUD로 바꾼다. 서서히 속도를 올리며 스티어링 휠을 휘저었다. 종종 오프로드를 강조하는 타 모델은 모래와 자갈이 쌓인 지형에서 꽃게마냥 옆으로 가거나, 드리프트라도 할 것처럼 미끄러져 갈 때가 있는데 체로키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날아갈 모래와 자갈을 꽉 부여잡으며 길을 헤쳐나간다. 가속 페달을 밟아 속도를 끌어올리며 달려봐도 체로키는 꿋꿋하게 제 할 일을 다한다. 역시 사람이든 자동차든 외모로 평가해서 안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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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사진을 건지게 위해, 어푸~어푸 잠깐만!

저 멀리 눈에 들어온 것이 있으니, 청명한 하늘빛을 훔쳐 품고 있는 강물 되시겠다. 천연 도화지에 먹물을 뿌려보고 싶어졌다. 자글자글한 자갈을 튕겨내며 강물을 향해 달려간다. 그래, 이 맛이다. 강물에 타이어가 잠겨도 힘 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정직하게 나아가는 맛. 체로키는 막연한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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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전국팔도 구석구석, 존재하지 않는 길은 없다. 이 녀석과 함께라면

조금 더 험준한 지역으로 이동해 터레인 모드를 변경하고 체로키를 닦달했다. 스티어링 휠을 꽉 감싸고 있던 엄지손가락도 겸손하게 풀어 덧올렸다. 서스펜션과 적당한 시트 쿠션감, 기능에 충실하듯 방관하듯 허리를 받쳐주는 볼스터가 꽤 조화롭다. 완전히 제어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운전자 운전 실력에만 기대지도 않는다. 내리막길에선 HDC로 거뜬하게 차체를 이동시킨다. 내리막 직후 고개를 쳐들어야 하는 오르막길, 어설프게 깎인 프런트 범퍼 라인이 빛을 발한다. 바닥이 긁힐 걱정이 없다. 기능은 디자인을 따른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신뢰의 오프로드, 실망의 온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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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하않...

앞, 뒤, 좌, 우로 신나게 몸을 던지며 아드레날린을 분출시켰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고단함이 밀려온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기능은? ACC다. ACC는 안전 확보를 위해 많이 부각되는 기능이지만 실제 사용면에선 편리함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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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에 충실한 디자인

입술을 질끈 깨문다. 앞 차를 인식하지 못하고 거친 황소처럼 돌진하려는 체로키를 겨우 달랬다. 4단계로 이뤄진 차간거리 조절이 무색할 만큼 모호한 거리 감각은 불안감만 가중시킨다. 차선 인식? 때때론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고 차선 중앙으로 차를 위치시키지도 않는다. 차선 끝으로 이동하면 살포시 밀어내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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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 펜타스타 엔진은 호! 호!

ACC 성능은 정말 좋게 봐줄 수가 없는 수준이다. 결국 ACC 기능을 끄고 꽉 막힌 도심 길을 뚫고 나가야만 했다. 체로키 트레일 호크는 3.2리터 V6 펜타스타 엔진에 9단 자동변속기가 조합됐는데 275마력의 최고출력과 32.1kg∙ m의 최대토크를 낸다. 펜타스타 엔진 자체는 엔진 회전수를 4,000대까지 사용하며 올곧은데 변속기가 이를 받쳐주지 못하는 느낌. 기어비가 꽤나 늘어지며 충격도 적잖이 전해진다. 덕분에 가속 시 답답함이 가슴 한켠을 차지한다. 제동은 초반 답력에 적응이 필요하고 전체적으론 진중하게 제동이 이뤄진다. 제동력 자체는 별다른 문제를 느끼기 어렵다. 패들 시프트는 특이하게 반이 잘려있다. 조작감은 무난한 정도며, 시프트 업은 살짝 반응이 더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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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한다. 체로키는 밤에 봐야 더 예쁘다

너무 안 좋은 점만 이야기했나? 사실 오프로드 성능이 더 뛰어났기에 상대적으로 온로드에서 손해 보는 점도 있었을 테다. 일반적인 SUV와 비교했을 때 승차감이 그리 뒤처지지 않는다. 적당한 바운싱으로 과속방지턱, 요철 구간에서 안정감을 보여주며 스티어링 휠도 가벼워 다루기 어렵지 않다. 120km/h 이하에선 풍절음이나 대화 전달력, 충격 소음도 적절히 걸러낸다.

맹목적인 믿음은 우리를 배신할지 모르나, 근거를 기반한 믿음은 우릴 배신하지 않는다. ‘JEEP+TRAIL RATED’ 조합은 우릴 배신하지 않을 근거가 되는 조합이다.

김상혁 cardyn@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