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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LA오토쇼에서 처음 만난 트레일블레이저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를 처음 만난 건 작년 11월 LA오토쇼 현장이었다. 무대를 채운 수많은 차들 사이에서 트레일블레이저는 유독 눈길을 끌었다. 단지 국내 출시 예정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탄탄해 보이는 몸매에 젊은 취향의 공격적인 얼굴이 어울려 첫인상이 꽤 마음에 들었다.

찬찬히 뜯어본 소감도 나쁘지 않았다. 겉모습만큼 실내 디자인도 짜임새 있었고, 차급에 어울리는 편의장비를 고루 담고 있었다. 전동 해치도어는 동급 경쟁모델에 없는 장비라 특히 기억에 남았다. 가만, 그동안 쉐보레에서 편의장비로 인상 깊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무튼, LA에서 담아온 트레일블레이저 소개 영상은 나름 반응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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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 셀토스 vs 쉐보레 트레일블레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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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들에게 없는 전동 해치도어

국내에서 직접 운전대를 잡고 달린 건 그 후로 약 3달 뒤였다. 동급에서 가장 판매량이 높다는 기아 셀토스와 나란히 놓고 비교했지만 서로 ‘다름’을 확인했을 뿐, ‘틀림’은 없었다. 디자인은 취향 따라 고르면 될 일이었고, 주행느낌은 트레일블레이저가 우세했으며, 실내 화려함과 편의장비는 셀토스가 앞섰다.

결국 내 선택은 트레일블레이저. 난 아직 젊고(?) 운전을 좋아해서인지 트레일블레이저에 더 마음이 갔다. 쉐보레 특유의 쫀득한 주행느낌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그 밖에 소소한 마무리와 편의사양까지 부족하지 않았다. 잘 달리는 건 알겠는데, 요목조목 비교하다 결국 종합 점수에서 밀리곤 했던 패착이 트레일블레이저는 없었다. 쉐보레 시승차를 반납하며 간만에 아쉬움이 남았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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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블레이저 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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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일블레이저 액티브

그래서 다시 타봤다. 이번엔 액티브다. 먼저 탔던 RS와 함께 최상위 트림이며, 보다 오프로드 성능을 강조했다. 실내외 곳곳을 터프하게 마무리했고, 험로 주행을 위해 최저지상고를 10mm 높였다. 휠은 RS보다 1인치 줄어든 17인치고, 오프로드 성향이 가미된 타이어를 신겼다. 확실히 RS가 더 멋있긴 하지만, 액티브라고 딱히 빠져 보이지 않았다. 둘 다 최상위 트림이고, 성격만 다를 뿐이니까.

이미 RS의 온로드 주행성능은 충분히 즐겨봤으니, 이번엔 액티브의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강원도 춘천 문배마을. 요즘은 관광지로 개발돼 많은 이들이 찾지만, 과거에는 한국전쟁조차 비껴갔을 만큼 그야말로 깡촌 중의 깡촌이었다. 지리적 위치에 걸맞게 문배마을에 당도하기 위해선 비포장 산길을 한참 달려야 한다.

진입로 초입에서 ‘AWD’ 모드로 설정했다. 평상시에는 앞바퀴로만 달리며 최대한 연료 소비를 줄이다 지금처럼 오프로드 주행 시 사륜구동을 쓰면 된다. 쉐보레에서 ‘스위처블 AWD’라고 부르며 자랑 중인데, 사실 다른 전륜구동 기반 SUV들이 즐겨 쓰는 전자식 풀타임 사륜구동 시스템과 기술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굳이 네 바퀴를 다 굴릴 일이 없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앞바퀴만 굴리도록 운전자가 확실히 묶어둘 수 있는 게 가장 큰 차이다. 차가 알아서 해주는 것도 좋지만, 때론 내가 알아서 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직관적인 경우도 있다.

AWD 모드로 전환하면 확실히 앞바퀴 미끄러짐이 줄어든다. 아스팔트에서 정차 중 가속페달을 갑자기 꾹 밟으면 잠깐 앞바퀴가 미끄러지던 것도 사라진다. 특히 이날처럼 비가 내려 길이 젖었거나, 진흙길이라도 오를 땐 분명한 이점을 제공한다.

문배마을 진입로는 오프로드 중 비교적 쉬운 편. 하지만 비포장길이 제아무리 매끄러워도 포장도로에 비할 수는 없다. 지하주차장 진출입로만큼의 경사가 이어지고, 군데군데 파였으며, 곳곳에 돌부리가 까꿍하는 길을 액티브는 RS보다 한결 부드럽게 소화한다. 오프로드 주행을 감안한 하체 설정과 작아진 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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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인치 휠에 다이나프로 AT2를 신겼다

트레일블레이저 액티브의 신발은 한국타이어의 다이나프로 AT2다. 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 모두를 공략하기 위한 전천후 타이어다. 이날 서울 시내와 고속도로를 달리고 가벼운 비포장도로까지 누볐으니, 문배마을 나들이에 최적화된 타이어란 뜻이다. 포장도로 고속주행 소음도 RS 대비 딱히 시끄럽지 않았고, 승차감은 보다 말랑말랑했으며, 비에 젖은 흙길에서도 좀처럼 미끄러지지 않았다. 휠도 타이어도 액티브와 찰떡궁합이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세는 험해졌고 숲은 우거졌다. 비가 내린 탓에 안개까지 자욱하니 분위기가 그만이다. 흔히 ‘데이트’라고 하면 예쁜 카페나 북적이는 놀이공원, 극장이 있는 쇼핑몰을 떠올리지만, 이날의 고요한 숲속 드라이빙은 색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그야말로 ‘데이트+힐링 패키지’라고 할 수 있으니, SUV를 가진 연인들에게 ‘강추’다.

이날 특히 고마웠던 장비는 바로 파노라마 선루프(프리미어, 액티브, RS 공통 111만 원)다. 넓은 유리 지붕에 맺힌 몽글몽글 빗방울 너머로 핑크빛 벚꽃잎과 푸른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산신령 놀음이 따로 없다. 셀토스는 1열까지만 빼꼼히 뚫린 작은 선루프가 고작이고 그나마도 투톤 루프와 동시에 적용할 수 없으니, 하늘을 감상하는 데는 트레일블레이저가 압승이다.

한때 ‘SUV는 디젤이지’라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아무리 짐이 무겁고, 길이 험해도 우직하게 밀고 나갈 것 같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날도 고즈넉한 산길을 유유자적 오르는데, 디젤 엔진이 딸딸거렸다면 분명 거슬렸을 터다. 터보를 장착한 신세대 가솔린 엔진의 토크가 과거보다 많이 올라간 이유도 있다.

마침내 도착한 문배마을은 날씨와 코로나19 탓에 고요했으며, 벚꽃으로 둘러싸인 호수엔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쪽에 차를 세우고 무선 애플 카플레이로 휴대전화를 연결한 뒤, 보스 스피커로 음악을 들었다. 일일드라마 속 PPL처럼 뜬금없어 보일 수 있는 전개지만,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다음엔 꼭 여자친구와 똑같이 다시 해보리라!’

서울로 돌아오는 길, 당초 트레일블레이저의 가장 큰 매력이었던 온로드 주행성능도 다시 한번 즐길 수 있었다. 액티브는 1.35리터 3기통 가솔린 엔진의 내세울 것 없는 크기로, 156마력 21.4kgm의 부족할 것 없는 힘을 발휘한다. 1,460kg의 몸무게를 일상적으로 운용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 회전수를 올려도 매끄러운 회전질감과 거북하지 않는 소리를 제공해, 여느 다운사이징 엔진들처럼 애처롭지 않다.

짱짱한 하체는 쉐보레의 오랜 장기다. 이 점에 있어서 트레일블레이저도 영락없이 쉐보레의 일원이다. 단단한 듯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고급차는 아니지만 속이 꽉 찬 느낌이랄까. 겉으로 화려하고 비싸 보이지만 막상 달려보면 텅텅 빈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낫다.

비 오는 날 완벽한 힐링 드라이브를 완성시킨 주인공은 날씨도 벚꽃도 아니었다. 모든 조건을 하나로 묶어준 트레일블레이저 액티브였다. 다시 트레일블레이저를 반납할 시간이다. RS 때도 그랬는데 액티브도 똑같이 아쉽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