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하늘은 흐렸고, 사람들 얼굴은 온통 마스크에 가렸으며, 길거리는 휑했다. 언젠가 봤던 공상과학 영화 속 디스토피아가 따로 없었다. 얼마 전 겨울의 끝자락, 을씨년스러운 서울을 떠나 파란 바다가 있는 강원도로 향했다. 마세라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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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반떼와 기블리, 르반떼 트로페오, 콰트로포르테

강릉으로 가는 길, 기블리와 콰트로포르테, 르반떼를 번갈아 몰았다. 사실 신차도 아닌 데다 이미 한 번씩 몰아본 터라 그다지 새로울 건 없었다. 셋 다 눈 감고 조수석만에 앉아도 마세라티인 줄 바로 알겠더라. 풍부한 가죽 냄새, 호쾌한 가속, 부드러우면서 묵직한 하체, 그리고 여기에 황홀한 배기음으로 화룡점정을 찍으니 딱 마세라티였다.

의외였다면 세단 둘과 SUV의 차이였다. 기블리와 콰트로포르테보다 SUV인 르반떼가 도리어 더 우악스러웠다. 콰트로포르테는 5m가 훌쩍 넘는 기함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기블리보다 르반떼에서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었던 과격함은 요즘 말로 ‘미쳤다’.

그리고 이튿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는 르반떼 트로페오를 탔다. 전날 탔던 르반떼의 최상위 트림이자, 마세라티 전 라인업에서 가장 강력한 모델이다. 그래서 이름도 ‘트로페오’, 즉 ‘트로피’다. 페라리의 V8 모델들과 거의 같은(배기량과 출력 등 세부사항은 다르다) 엔진을 얹고 590마력에 74.85kgm를 발휘한단다. 납작하고 가벼운 슈퍼카가 아니라, 키 170cm에 몸무게 2.3톤짜리 대형 SUV가 말이다.

엔진 존재감은 시동만 걸어도 바로 알 수 있다. 6기통의 부드러움과는 확연히 다른 8기통의 우렁찬 기지개가 주차장을 채운다. 슈퍼카에서나 듣던 소리다. “그래, 너 ‘슈퍼 SUV’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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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리터 V8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

시내에서 앞 차 출발에 맞춰 먼저 간이라도 볼 요량으로 가속페달을 찔끔 밟았다. “아~” 출발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감탄하다니.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다시 오른발에 스윽 힘을 줘본다. “아~” 또 느껴버렸다. 불과 시속 20-30km인데도 등을 밀어주는 게 다르다. 마동석 씨에게 딱밤 맞는 꼴이랄까? 그는 아직 주먹도 쥐지 않았다.

드디어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본격적으로 봉인을 해제할 시간. 기어노브를 운전자 방향으로 당겨 수동모드에 두고, 바로 옆 버튼을 눌러 주행모드를 ‘SPORT’로 설정했다. 뻥 뚫린 전방을 확인하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자 무섭게 속도계를 올려간다.

제원상 0-100km/h 가속시간은 3.9초(코르사 모드). 이보다 빠른 차들이야 여럿 타봤지만 느낌이 꽤 다르다. 스포츠카는 가볍고 강렬하게 ‘빵!’ 하고 나간다면, 르반떼 트로페오는 묵직하면서 후련하게 ‘부앙!’하고 튀어나간다. 네 바퀴에 힘을 쏟아내 허둥거림 따위는 없다. 갑자기 시야가 좁아지면서, 앞서 달리던 차가 순식간에 사이드미러 속 점이 돼 있을 뿐이다.

마세라티를 타면서 소리 얘기를 안 할 수 없지. 르반떼 트로페오를 ‘연주’하는 법은 간단하다. 오른발을 까딱이고, 운전대 뒤 커다란 금속 시프트패들을 튕기면 그만. RPM이 5천을 지나 6천, 7천을 향해 치달을 때 들려오는 장엄한 오케스트라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만사 스트레스가 녹아 없어진다. 훗날 길거리에 전기차만 다니게 된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엔진음과 배기음을 유튜브로만 들어본 시대가 온다면, 나는 자랑스레 ‘라떼는’ 레퍼토리를 풀어놓을 테다. “늬들이 마세라티 소리를 알아?”라고.

시프트패들의 위치와 생김새, 작동 느낌을 봐도 마세라티의 지향점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보통 다른 차들의 방향지시등이나 와이퍼 조작 레버가 있는 곳에 떡하니 자리했으며, 소재는 금속이요, 길이도 길다. ‘철컥’하고 당기는 변속의 맛을 마세라티는 원조집 비법소스쯤으로 여기는 게 분명하다. 마세라티만의 특제 양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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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컹" 당기는 맛이 일품인 시프트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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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페달 옆 금속판도 마세라티의 성격을 드러내는 작은 요소

변속기는 ZF의 8단 자동이다. BMW를 비롯해 수많은 후륜 기반 차에 달리는 그 변속기다. 전반적인 반응은 명성만큼 준수했다. 하지만 엔진 성능과 시프트패들 조작감이 워낙 특출나서였을까? 혹은 페라리나 포르쉐의 ‘텔레파시급’ 빠릿함을 기대해서였을까? 수동 변속 속도는 상대적으로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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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F 8단 자동변속기

보다 기억에 남았던 건 하체의 태세 전환. 시내에서 찰랑찰랑 엉덩이를 어루만지던 하체는, 고속도로에서 차체를 낮추며 단단하게 붙든다. 유치원 선생님처럼 상냥하더니, 어느 순간 강력반 형사처럼 단호해진다. 6단계로 높이 조절이 가능한 에어 서스펜션 덕이다.

끝이 아니다. 단호한 와중에도 또 부러질 듯 딱딱하지는 않다. 작은 요철도 빠르게 넘으면 충격이 커지거늘, 르반떼 트로페오는 초지일관 의연하다. 고속에서도 다리 이음매를 ‘꾸~욱’ 삼켜버리는 게 신기할 지경. 유연하면서 튼튼한 하체의 대응 범위가 놀랍다. SUV라서 필연적으로 높은 시트 포지션만 아니라면, 하체 때문에 불안하거나 불편할 일은 없겠다.

운전대를 쥔 손에 땀도 식힐 겸 잠시 휴게소에 들렀다. 어디 찬찬히 생김새를 뜯어보자. 겉모습은 여느 르반떼와 큰 차이가 없다. 애초부터 사납게 생겼으니 망정이지, 자칫 몰라볼 수 있겠다. 앞에선 그릴과 범퍼 흡기구의 내부 장식을 조금 바꿨고, 중간중간 카본으로 비싼 티를 더했을 뿐이다. 옆에선 휠하우스를 가득 채운 22인치 휠과 고무밴드를 두른 듯 납작한 타이어(앞 35, 뒤 30 시리즈), 그리고 D필러에 붙은 삼지창 엠블럼 정도만 다르다. 삼지창도 조그맣게 ‘TROFEO’라고 써놓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치겠다.

더 자랑해도 좋았을 ‘TROFEO’ 이름표는 엉덩이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대신 ‘LEVANTE’ 아래 밑줄만 쫙 그었다. 범퍼 하단 배기구를 감싼 카본도 몇 안 되는 단서 중 하나. 아, 빠뜨릴 뻔했다. 보닛 위에 뚫린 두 개의 송풍구도 다른 르반떼에는 없는 트로페오만의 특징이다. 절절 끓는 엔진 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구멍이다.

실내는 어떨까? 아쉽게도 역시 별 차이가 없다. 대시보드와 센터터널, 도어트림의 카본 장식(나무와 고광택 카본도 고를 수 있다)을 매끄러운 광택 처리 대신 카본 섬유의 엮임이 그대로 전해지는 매트 마감을 한 점이 가장 특별하다. 그리고 시트 머리받침의 붉은색 ‘TROFEO’ 자수 정도가 전부.

뭐, 좋다. 천연가죽 시트와 알칸타라 천장, 카본과 알루미늄 엑센트가 어우러진 실내는 대중 브랜드와 확실히 ‘급’을 달리한다. 차 값이 차 값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마세라티를 탈 때마다 항상 진한 아쉬움이 남는 건 시대에 뒤처진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탓이 크다.

계기반(7인치)과 대시보드(8.4인치)에 박힌 디스플레이는 크기와 해상도, 그래픽 모두 2020년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살짝 아래 위치한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는 물론, 심지어 일부 대중 브랜드조차 요즘 와이드 모니터에 3D 효과까지 버무려 화려하기 이를 데 없거늘. 유명 특급 호텔에 명성 듣고 갔더니 가구와 TV가 구식이라면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또 있다. 몇몇 고급스럽지 못한 플라스틱 부품이 분위기를 깬다. 주변 고급 소재에 둘러싸여 더 비교된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그렇지만, 이 역시 모기업인 FCA와 부품을 공유한 결과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넘기기엔 브랜드 가치와 차 값이 걸린다. 언제까지 ‘이탈리안 감성’에만 호소할 텐가? 비교적 쉽게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라, 아쉬워서 하는 얘기다.

휴게소를 빠져나오며 이번엔 ‘코르사’ 모드로 설정했다. 영어로 ‘레이스’란 뜻이고, 트로페오에만 허락된 설정이다. 아까 ‘스포츠’보다 한층 과격함이 더하다. 차체를 내려 노면에 바짝 엎드리고, 엔진은 더 크게 으르렁대며, 약이 바싹 올라 가속페달을 툭 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스포츠 모드가 그냥 괴물이었다면, 코르사는 화난 괴물이다.

괴물은 먹성도 범상치 않았다. 복합공인연비는 리터당 5.7km. 이날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 기록한 계기반 연비는 리터당 4.6km였다. 모처럼 넘치는 힘에 취한 대가다. 항상 이렇게 탔다가는 고급유로 가득 채운 80리터짜리 연료탱크가 금세 바닥을 드러낼 터지만, 즐거움의 크기를 생각하면 기름값쯤이야! (라고 쓰면서 손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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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후 서울에 다 도착했을 즈음엔 4.6km/L까지 올랐다

서울이 가까워지며 시나브로 차가 많아진다. 잠시 잊었던 복잡한 도심과 우울한 하늘이 떠올라 씁쓸하던 찰나, 가속페달을 다시 꾹 밟았다. 육중한 덩치가 날래게 차선을 바꿔 물며 내가 의도한 곳으로 콕 박힌다. “아~” 아침에 뱉었던 감탄사가 또 나왔다. 외마디 신음과 함께 스트레스가 녹는다.

그럴 일은 거의 없겠지만, 초보 운전자들은 르반떼 트로페오를 타면 안 되겠다.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당연히 그들의 운전실력과 차의 성능 차이가 너무 커서다. 초보가 트로페오를 모는 것도, 트로페오가 초보에게 지배당하는 것도 모두 불행이다. 심지어 운전 경력이 꽤 되더라도, 절대 함부로 덤비지 말자. 미리 트로페오의 잠재력을 알아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진짜 이유는 두 번째다. 트로페오를 첫차로 타면 그다음 어떤 차를 경험해도 심심하기 때문. 세상엔 재미있는 차들이 많다. 출력이 낮아도, 크기가 작아도 각자의 개성으로 즐거움을 주는 차들 말이다. 하지만 트로페오에 익숙해져 다들 이 정도인 줄 착각한다면 자칫 다른 차들의 맛이 다 싱거워질 수 있다.

출퇴근길 도심에서 르반떼 트로페오를 모는 건 욕조에서 오리발 끼고 수영하는 꼴이다. 남아도는 힘이 애처로울 정도. 건틀릿 낀 타노스의 심정도 짐작할 수 있다. 어벤저스가 아무리 공격해도 여유를 잃지 않듯, 주변 차들이 끼어들고 시비 걸어도 ‘그러거나 말거나’다. 타노스 손가락 튕기듯, 오른발만 쿡 밟으면 상황 종료다.

첫날 탄 르반떼S가 ‘미친’ SUV라면, 둘째 날 탔던 르반떼 트로페오는 한 옥타브 위 ‘미’친 SUV였다. 작년에 들여온 르반떼 트로페오 10대는 이미 ‘완판’이다. 올해 다시 10대를 들여온다고 하니 슈퍼 SUV에 관심 있다면 꼭 경험해보길!

이광환 carguy@car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