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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 스파이더

혹시 페라리 360 모데나를 기억하는가? 2000년 대 초반, 길거리에서 달리는 걸 직접 봤다면 본인의 ‘연식’이 적어도 80년생 이전일 확률이 높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나도 360 모데나를 통해 페라리에 처음으로 ‘앉아만’ 봤다. 한동안 이 경험을 친구들에게 참 많이도 자랑하고 다녔더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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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모데나

그 후로 360은 F430과 F458, F488까지 세 번의 진화를 거쳤다. 따끈따끈한 신형 F8까지 포함하면 네 번이다. 그렇게 8기통 페라리의 명맥은 유유히 흘러왔다. 그 사이 나는 시나브로 ‘불혹’이 됐다. ‘사람은 늙고, 차는 좋아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갑자기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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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430(위)과 F458 이탈리아(아래)

그래도 하나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얼마 전 488 스파이더를 인제 스피디움 서킷에서 잠깐 몰아볼 수 있었기 때문. 학창시절 짝사랑했던 친구와 성인이 돼 만나 드디어 데이트 한 기분이 이럴까? 기억 속 짝사랑은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도 있지만 488은 달랐다. 360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모습에, 과거 360 조수석에 앉았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만큼 짜릿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488 GTB가 국내 출시된 건 2015년 7월. 벌써 4년이 지났다. 488 스파이더 역시 같은 해 말 우리 땅을 밟았다. 이미 수년이 지나 새로울 게 없을 듯하지만, 페라리가 어디 그렇게 흔하던가? 몇 년 사이 급격히 수가 많아지긴 했지만, 그것도 다 서울 강남이나 부산 해운대 같은 일부 동네에나 해당되는 얘기. 워낙 흔치 않은 페라리다 보니 아무리 신차가 아니라도 어제 출시한 국산차만큼 신기하다.

488 스파이더가 신기한 건 단순히 자주 볼 수 없어서가 아니다. 1,952mm의 너비에 1,211mm의 높이는 길거리 흔한 승용차를 기름판 위 호떡 반죽처럼 꾹 눌러놓은 비율이다. 지난달 등장한 488 후속 F8 트리뷰토는 여기서 더 넓고, 낮아졌다. 이러다 아스팔트와 하나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납작한 차체에 20인치 휠은 슈퍼카 다운 당당한 자세를 연출한다. 휠 내부는 앞 398, 뒤 360mm 지름의 카본세라믹 로터로 가득 채웠다.

스파이더만의 특징은 후방 상단에 몰려있다. 시트 뒤로 솟아있는 좌우 삼각뿔은 지붕을 열어도 전혀 흐트러짐 없는 실루엣을 만든다. 하지만 밖에서 뒷유리를 통해 페라리의 상징인 붉은색 흡기다기관을 볼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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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진 덮개를 열어도 엔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비범함은 차에 타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실내에 묻히듯 자세를 잡고 나면, 모든 요소가 운전자와 운전 자체에 집중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운전대만 봐도 시동버튼과 헤드램프, 방향지시등, 와이퍼 그리고 주행모드까지 모두 운전에 꼭 필요한 기능만 골라 달았다. 이 정도면 서킷 공략 중엔 달리 더 필요할 게 없다. 레이싱에 뿌리를 둔 페라리의 탄생 배경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렇다고 488 스파이더가 아주 달리기에만 올인 한 건 아니어서, 호화로움과 편리함도 충분히 함께 즐길 수 있다. 플라스틱 따위는 버튼과 다이얼에만 썼다. 부자들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실내를 마감했고, 편의장비는 없어서 불편하지 않을 수준이다. 설마 페라리 타면서 마사지시트를 기대하지는 않을 테니.

시승차는 흔히 볼 수 없는 푸르스름한 가죽을 두르고 흰색 실로 박음질해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감돈다. ‘카본 인테리어 업그레이드’는 몰랐다면 모를까 한번 본 이상 넣지 않고는 못 배길 듯. 역시 카본은 진리다.

 

여전히 짜릿한

페이스카를 따라 트랙에 들어선다. 왼쪽 방향지시등을 켜고 서킷에 합류하는데, 사이드미러에 비친 엉덩이가 심상치 않다. 웅크려앉은 육식동물의 뒷다리처럼 차체에서 한참 튀어나왔고, 그 사이에는 커다란 흡기구가 탐욕스럽게 뚫렸다. 확실히 458 시절 C필러 위치보다 한결 미드십 슈퍼카답다.

역시 첫 바퀴는 살살 달리며 탐색전을 갖는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지만 670마력, 77.5kgm을 내는 V8 트윈터보 엔진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등 뒤에서 숨죽이며 절절 끓고 있다가도, 언제든 오른발을 차는 순간 ‘우앙!’ 소리 지르며 100m 앞에다 날 내다 꽂을 엔진이다. 페라리가 밝힌 스로틀 반응 속도는 0.8초. 터보렉 따위 느낄 수 없었다.

운전자와 차가 한 몸이 된 듯 달릴 수 있는 데는 변속기도 한몫 단단히 한다. 시프트패들을 튕기면 망설임도 지연도 없이 기어를 바꿔문다. F1에서 담금질한 7단 DCT라니, 말해 무엇할까?

더 인상적인 건 ‘오토’ 모드. 코너 진입 전 엔진회전수가 솟구치며 엔진브레이크를 거는 과정, 코너 탈출 시 엔진회전수를 레드존(8,000RPM)까지 쥐어짜며 다음 기어로 바통을 넘기는 과정이 모두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재미만 아니라면, 오토로 타는 게 기록은 더 잘 나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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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의 마네티노 스위치는 '스포츠'가 기본 모드다

페이스카가 조금씩 속도를 높여간다. 코너 진입 전 감속하고, ‘아웃-인-아웃’을 그리며 CP(클리핑 포인트: 코너 가장 안쪽의 가상 지점)를 찍은 뒤, 다시 운전대 풀며 가속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일반 승용차였으면 벌써 저만치 날아가 버렸을 속도지만, 488 스파이더는 타이어 비명 소리 하나 없이 태연하게 해치운다.

특히 엉덩이 접지력은 껌딱지가 따로 없다. 전자장비를 완전히 끄고 일부러 미끄러뜨리지 않는 범위라면, 뒷바퀴는 끈적끈적 앞바퀴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 물론 여기까지는 나 같은 일반인을 위한 친절일 뿐, 충분한 운전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뭉게뭉게 뒤 타이어를 태우며 옆걸음질로 코너를 공략할 수 있을 터.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최근 같은 서킷에서 경험한 람보르기니 우라칸 에보가 떠올랐다. 후륜구동 488 스파이더가 그립주행과 드리프트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실력에 따라 감성 충만한 즐거움을 제공했다면, 4륜구동 우라칸 에보는 타이어와 노면을 아예 접착제로 붙여버려 이성적으로 기록 단축을 노린 인상이었다. 우라칸이 롤러코스터라면, 488은 워터슬라이드랄까?

페라리하면 또 소리를 빠뜨릴 수 없지. 생각보다 굵직한 배기음이 실내를 채우고, 가슴을 울린다. ‘우우웅’하는 울림이 기어 단수와 오른발의 까딱임에 맞춰 세밀하게 오르내리는데, 마치 관악기 속에 들어앉은 듯하다. 솔직히 작년에 타본 812 슈퍼패스트의 V12 자연흡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달팽이관을 희롱하는 실력은 이미 둘 다 전자발찌감이다.

 

안녕~ 488, 안녕? F8

이날 주행은 시간 관계상 워낙 조금밖에 달리지 못했다. 간단히 맛만 보는 수준이라 아쉬움이 컸다. 잠깐이지만 488 스파이더가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812 슈퍼패스트보다 순수하고, 포르토피노보다 진지했다. 어지간한 고성능 차들이 ‘서킷도’ 잘 달리도록 준비했다면, 488 스파이더는 ‘일반도로도’ 편하도록 배려한 느낌이 영락없은 슈퍼카였다.

488은 페라리 라인업의 대들보 같은 모델이다. 포르토피노와 함께 ‘입문용 페라리’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높은 판매량으로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그 와중에 페라리에 기대할 수 있는 운동성능은 부족함 없이 담아내야 한다.

담당자에 따르면 페라리가 국내시장에서 자리 잡는 데 전작 458의 공이 매우 컸다고 한다. 458의 판매 성공은 488에 그대로 전해졌으며, 이제는 F8 트리뷰토가 이어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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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의 뒤를 잊는 F8 트리뷰토

F8 트리뷰토는 488과 같은 차체, 동일한 엔진을 얹고 소소하게 업그레이드했다. 40kg 무게를 줄였으며, 최고출력은 50마력이 오른 720마력이 됐다. 덕분에 0-100km/h는 0.1초, 0-200km/h는 0.5초가 줄었다.

458로 완성하고, 488로 숙성시킨 페라리 V8 스포츠 모델이 한번 더 진화한 셈이다. 488 스파이더의 '진한 맛'을 보고나니, F8 트리뷰토가 품었을 '깊은 맛'이 더 궁금하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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