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볼트 EV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쉐보레가 볼트 EV를 국내 출시하며 383km까지 달릴 수 있다고 힘주어 광고한 직후였다. 당시만 해도 길거리 전기차들은 고작 150km마다 충전이 필요하던 시기. 서울 사당에서 기자를 포함한 남자 둘은 호기롭게 내비게이션 목적지에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을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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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부산 톨게이트 앞에서

결과는 ‘거의’ 성공이었다. 광안리는 못 갔지만, 부산 톨게이트를 지나 근처 충전소에 당도했으니까. 그리고 2019년 3월, 볼트 EV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제주다. 제주공항을 출발해 한라산을 가로질러 남서쪽 산방산 부근을 찍고 돌아오는 코스다.

솔직히 볼트EV도 볼트EV지만, 간만의 제주 나들이가 설렜다.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 하늘에 지처, 파란 남쪽 나라의 바다와 하늘이 그립던 참이다. 더구나 지금은 유채꽃이 ‘노랑노랑’ 봄기운을 뿜어내는 중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공기도, 가로수도, 심지어 돌멩이도 다르다. 제주도가 우리나라라는 게 새삼 감사한 순간이다. 볼트EV에 대한 기술 설명을 들은 뒤, 드라이브에 나섰다. 이국적인 풍광을 소리 없이 스쳐가니 평소와 다른 ‘여행 기분’이 배가된다. 제주도와 전기차는 지리, 경제 모든 면에서 참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출발 당시 계기반에 표시된 평균 주행가능거리는 300km. 이날 달리게 될 110km 정도는 충전 없이 마음 놓고 돌아올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전기를 아낄 수 있느냐다. 시내 구간과 국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확실하게 나뉘는 코스는 회생제동장치가 수시로 개입할 수 있어 전기차에게 유리하다.

회생제동장치는 평상시 구동을 책임 지던 모터를 제동 시 거꾸로 돌려 발전기 역할을 하도록 한다. 전기를 가져다 바퀴를 굴리다, 때로는 굴러가는 바퀴로 전기를 만드는 장치다. 볼트EV가 자랑하는 ‘리젠 온 디맨드’와 ‘원페달 드라이빙’ 기능은 주행거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

제주 시내를 벗어나 드디어 와인딩에 들어섰다. 창밖으로 아름다운 제주 경치가 그림처럼 펼쳐졌지만, 마냥 관광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원패달드라이빙의 감각에 적응하고, 계기반의 주행가능 거리 변화를 살피며, 동시에 전반적인 주행성능도 느꼈다.

오르막이 시작됐지만 힘 부족은 없다. 오히려 초반부터 쏟아지는 최대토크 덕분에 재가속이 산듯하다. 내 의도가 연료펌프와 피스톤, 변속기를 거쳐 바퀴를 굴리기까지 지연도 없으니, 저속에서 ‘훅~’ 치고 나가는 맛은 웬만한 스포츠카가 부럽지 않다.

시원한 가감속에서 시작한 운전 재미는 낮은 무게 중심으로 완성된다. 전기차에서 가장 무거운 배터리를 차체 바닥에 낮게 깔아, 운전대를 휘저어도 안정감이 높다. 긴 주행거리를 위해 더 크고 무거운 배터리를 실어야만 하는 전기차의 숙명이 본의 아니게 주행성능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느덧 한라산 중턱 1100고지에 도착했다. ‘1100고지’는 해당 도로에서 가장 높은 곳이 해발 1,100m라서 붙여진 이름. 이곳에 오르기까지 배터리 잔량은 뚝뚝 떨어져, 주행가능거리 216km를 보여준다. 불과 23.5km를 달렸으니 이동거리 대비 많이 줄었다. 역시 차도 사람도 오르막이 가장 힘들다. 자전거만 타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자, 이제 내리막이다. 지금까지는 배터리를 잡아먹고 왔지만 앞으로는 배터리를 다시 채울 차례. 회생제동장치의 효율을 자랑하고 싶은 쉐보레가 기대했을 순서다. 오면서도 그랬지만, 내리막이야말로 본격적으로 ‘리젠 온 디맨드+원페달드라이빙’ 콤보가 제 몫을 다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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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젠 온 디맨드 버튼

리젠 온 디맨드는 운전대 좌측 뒤에 달린 버튼으로 회생제동장치의 개입을 높이는 기능. 버튼을 누르면 속도가 더 줄고, 그만큼 버려지는 전기를 많이 모을 수 있다. 평소 느낄 수 없는 ‘멈추는 재미’까지 제공한다.

반면 원페달 드라이빙은 가속페달을 ‘밟은 만큼만’ 가는 기능이다. 보통은 가속페달에서 발을 떼면 달리던 속도를 유지한 채 쭉 미끄러지지만, 원페달 드라이빙은 뗀 만큼 느려지는 점이 다르다. 갑자기 뗀다고 확 멈추는 것은 아니고, 브레이크 페달을 살짝 밟은 정도로 속도가 줄어든다. 이때 제동등이 켜져 뒤차에 신호를 보내니 후방 추돌은 걱정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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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페달 드라이빙으로 인한 제동 중력가속도가 0.13G 이상이면 제동등이 들어온다

원페달 드라이빙은 기어노브를 D 아래 ‘L’로 두면 활성화된다. 일반 자동변속기의 ‘오버드라이브’가 꺼져 엔진 브레이크가 걸린 상태와 비슷하다. 원페달 드라이빙만으로 완전 정차가 가능하고, 차가 완전히 선 후에는 페달에서 발을 떼도 주차브레이크가 잡힌 상태로 유지되니 의도치 않게 차가 밀릴 염려는 없다.

단점도 있다. 처음에는 이질감이 심한 게 사실. 평소 습관대로 가속페달을 조작하면 생각보다 한참 빨리 속도가 죽어버려 다시 가속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많은 볼트EV 차주들이 원페달 드라이빙 기능을 잘 쓰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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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페달 드라이빙은 기어노브를 L로 놓으면 된다

하지만, 잠시 적응 기간을 거치고 나면 오히려 편하다. 페달 조작과 감속 정도를 감안해 적당한 거리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여갈 수 있고, 나중엔 브레이크 페달을 전혀 밟지 않은 채 정확하게 서는 것도 가능하다. 특히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환경에서 빛을 발하는데, 오른 다리 전체를 들어 페달을 옮겨 밟는 것보다 발목만 까딱이는 편이 한결 낫다.

물론, 원페달 드라이빙의 본래 목적은 운전자의 편리보다 버려지는 전기를 최대한 싹싹 주워 담는 데 있다. 1100고지를 찍고 내려오는 길, 계기반의 주행가능거리가 계속 늘어난다. 216km까지 줄었던 주행가능거리는 점점 올라 급기야 평지에 내려왔을 때 290km를 찍었다. 달리면 달릴수록 더 멀리 갈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이다. 발전을 하는 만큼 브레이크를 덜 밟아도 된다는 부가적인 장점도 있었다.

이날 반환점을 찍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제주공항으로 왔을 때,  우리는 총 118.7km를 달렸다. 남은 주행가능거리는 191km. 처음에 300km를 갈 수 있다고 했으니, 계기반상 숫자로만 단순 계산해 약 10km를 덤으로 챙긴 셈이다.

이는 오르막에서 더 쓴 만큼 내리막에서 더 벌어들인 결과이자, 리젠 온 디맨드와 원페달 드라이빙 덕분이다. 똑같이 더 쓰고, 비교적 덜 벌었을 다른 전기차들 대비 확실한 강점이다.

국내에 볼트EV가 등장한지도 약 2년이 흘렀다. 그 사이 경쟁자들의 성능도 훌쩍 높아져, 이제 거의 볼트EV와 비슷한 주행거리를 갖추게 됐다. 주행거리 200km 이하의 전기차들을 1세대로 본다면, 볼트EV는 약 400km를 달릴 수 있는 2세대 전기차의 첫 번째 모델이었다. 과거 1996년 EV1을 통해 매우 일찌감치 전기차 시대를 열 수 ‘있을 뻔’ 했던 GM다운 발 빠른 포석이었다.

리젠 온 디맨드와 원패달 드라이빙 같은 기술은 데뷔 당시 볼트EV의 특장점이자 상당히 앞선 기능이었다. 이후 출시된 많은 전기차들이 비슷하거나 이름만 다른 기능들을 달고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제주 시승을 통해 확인한 볼트EV의 '전비'는 이들 기능 덕분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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