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공부도 잘 하면서 운동신경까지 뛰어난 친구들이 있었다. 교실은 물론 운동장에서도 ‘미친 존재감’을 뽐낸다. 여기에 준수한 외모와 원만한 성격까지 갖추면 그야말로 ‘사기캐릭터’다. 선생님들에게는 평균성적을 올려주는 애제자요, 교우들에겐 인기폭발 영웅이다.

자동차 세계에도 이런 차들이 있다. 슈퍼세단이 바로 그렇다. 디자인, 성능, 출신, 실용성까지 빠지는 구석이 없다. 가족여행도 가능하며, 나 홀로 드라이빙에는 더 좋다. 일반도로는 물론 당장 트랙에 들어서도 어지간한 상대는 씹어 먹는다. 오늘의 주인공은 미국 출신 슈퍼세단 캐딜락 CTS-V다.

90년대 중후반, 캐딜락은 ‘미국의 돈 많은 은퇴한 할아버지들이나 타는 차’ 이미지가 강했다. 크고 고급스럽지만 정교함이나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이 든 소비자들과 함께 브랜드도 늙어가는 듯 했다. 이런 캐딜락이 회춘의 발판으로 삼았던 차가 2002년 등장한 1세대 CTS였다.

2004년 추가한 CTS의 고성능 버전 ‘CTS-V’는 달라진 캐딜락을 알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캐딜락의 이미지는 몰라보게 젊어졌다. CTS는 2008년과 2013년 두 차례 세대교체될 때마다 매번 CTS-V를 추가하면서 역동성을 뽐냈다. 현행 CTS-V는 3세대를 기본으로 2016년 태어났다.

 

배우 마동석을 닮은 CTS-V

CTS-V의 외모는 한눈에도 범상치 않다. 일반 CTS가 말쑥하게 정장 차려입은 원빈이라면, CTS-V는 셔츠 단추 2개쯤 풀어헤친 마동석 같다. 우람한 근육이 슬쩍슬쩍 비친다. 앞에서 누군가 깝죽거리면 ‘우와~ 양카다!’를 외치며 혼꾸멍 내 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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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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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떨어지는 램프는 캐딜락의 상징

CTS-V는 ‘V-그릴’로 불리는 메시 패턴으로 라디에이터를 덮었다. 메시 그릴은 벤틀리와 재규어 등이 애용하는 것으로 고급 고성능 차에는 자주 사용되는 요소다. 멋보다 공기를 충분히 빨아들이는 본래 기능에 충실한 모습인데,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 멋있다.

고성능 모델 혹은 고성능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모델들이 가장 흔하게 고치는 화장이 바로 입매. CTS-V도 입을 더 크게 벌려 송곳니를 드러냈다. 앞범퍼 좌우 흡기구는 크기가 커졌을 뿐 아니라 실제로 구멍을 뚫고 안쪽으로 라디에이터를 심었다. CTS를 포함한 일반 세단들은 이 부분이 보통 막혀 있다.역시 슈퍼카 뺨치는 성능은 슈퍼카 뺨치는 냉각이 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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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에 뚫린 구멍마다 라디에이터가 달렸다.

CTS-V의 외모를 논할 때 보닛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SF영화 스타트렉(Star Trek)에 등장하는 외계종족 클링온(Klingon)의 이마를 떠올릴 만큼 주름이 깊게 패었다. 가운데 홈도 장식이 아니다. 엔진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실제 구멍이다. 아참, 소재는 무려 카본이다. 도시락 뚜껑처럼 가볍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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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석에서 보면 엔진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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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 뚜껑처럼 가볍게 열리는 카본 보닛

휠하우스를 가득 채운 19인치 경량 단조휠과 미쉐린 파일럿 스포트 타이어, 휠 스포크 사이로 보이는 390mm 사이즈의 전륜 디스크 로터, 이를 물고 있는 붉은색 6피스톤 브렘보(brembo) 캘리퍼까지, 발목 아래 장비만 봐도 CTS-V의 성능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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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인치 단조 휠 + 미쉐린 파일럿 스포트 타이어 + 390mm 디스크 + 6피스톤 브렘보 캘리퍼

뒷모습은 CTS-V만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트렁크 모서리에 달린 스포일러의 크기가 조금 더 크고, 뒷범퍼 하단에 디퓨저가 달렸을 뿐이다. 상관없다. 오른발만 까딱하면 CTS-V는 금방 사라져 버릴 테니, 뒷모습을 볼 겨를이 없다. 좌우에 달린 듀얼 배기구는 V8 엔진의 우렁찬 포효를 토해낸다. CTS-V의 뒤태는 디자인보다 소리로 기억에 남는다.

 

탐나는 레카로 시트

밖에선 디자인으로 우락부락함을 과시했다면 실내에선 소재를 통해 특별함을 내세웠다. 운전대와 시트, 천장을 ‘극세사 스웨이드’로 덮었다. 일반 CTS도 이미 스포티함과 고급스러움을 꽤 지니고 있었고, 실용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세단이기 때문에 변신에 한계가 있었을 터.

실내에서 CTS-V만의 특별함이 가장 잘 묻어나는 요소를 뽑자면 바로 레카로(RECARO) 시트다. 먼저, 머리받침 일체형 등받이와 어깨부분 금속장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엉덩이와 등이 닫는 부분을 극세사 스웨이드로 만들어 타이어 비명이 들리는 상황에서도 몸이 미끄러지지 않고, 적당히 튀어나온 좌우 날개는 훌륭한 지지력과 승하차의 용이함을 동시에 제공해 엉덩이까지 매료시킨다.

CTS-V만의 또 다른 차이는 계기반이다. ‘스포트’와 ‘트랙’ 모드에서는 가운데 원이 흰색으로 바뀌며 재미를 높인다. 화려한 색깔과 좌우 중앙에 그려지는 다양한 정보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전체적인 그래픽의 세련미와 일목요연함은 최신 경쟁 모델들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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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와 '트랙' 모드에서는 중앙 원이 하얀색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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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같은 정보가 뜨기도 한다. 4개의 실린더만 쓸 때는 ‘V4’라고 뜬다.

아쉬운 부분은 또 있다. 터치 방식으로 작동하는 센터패시아 버튼들이다. 캐딜락이 자랑하는 인터페이스 ‘CUE(캐딜락 유저 익스피어리언스, Cadillac User Experience)’는 조작성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간혹 잘 반응하지 않는 데다, 눌렸을 때 전해지는 햅틱 반응도 개운하지 않다.

요즘처럼 터치 방식이 득세하는 시대에, 아무리 CUE가 불편하다 한들 다시 기계식 버튼으로 돌아갈 리는 없어 보인다. 부디 다음 세대엔 더 편리하고 직관적으로 개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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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열 시트 등받이 뒷면은 전부 극세사 스웨이드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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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트렁크는 슈퍼세단의 빠뜨릴 수 없는 덕목

 

'ㄷㄷㄷ'이럴 때 쓰자

‘648마력이라니......’ 나름 도로에서 방귀 좀 뀐다는 차들을 여럿 몰아봤지만, 솔직히 600마력대는 처음이다. 시승 일정을 잡고 슬슬 걱정이 들었다. 일반 세단이었다면 어디에 가서 예쁜 그림을 담을지 고민했겠지만, CTS-V는 운전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600하고도 48마력이 더 높은 출력은 내 차보다 무려 4배가 넘는다. ‘ㄷㄷㄷ’은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보다.

CTS-V의 심장은 배기량 6,162cc V8 엔진으로 슈퍼차저를 얹어 648마력, 87.2kgm를 발휘한다. GM 가문 출신에서 가장 강력한 성능을 자랑하는 쉐보레 콜벳 Z06와 카마로 ZL1과 동일한 엔진이다. 두 모델에 비하면 10마력 정도 출력을 낮췄지만, 이 정도 급에서 유의미한 감소는 아니고 하극상 방지 혹은 스포츠카에 대한 예우 차원 정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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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리터 V8 슈퍼차저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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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보레 콜벳 Z06와 카마로 ZL1과 공유하는 LT4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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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이 로켓 발사 스위치

뭣도 모르고 까부는 철부지가 되긴 싫었다. 처음부터 648마력의 반응을 가늠할 수 없었기에 오른발목을 소심하게 까딱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시내 구간 교통흐름을 따라가는데 여유가 넘쳤다. 도시가 작아진 듯, 신호등 사이가 짧아진 듯 축지법을 부렸다.

이 정도면 탐색전을 마쳤다고 생각할 즈음, 뻥 뚫린 고속도로가 나타났다. 이때다 싶어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당연히 주행안전장치는 모두 켜져 있는 상태. 그런데도 CTS-V는 엉덩이를 좌우로 실룩거린다. 목이 뒤로 휙 젖혀지고, 등은 시트에 파묻힌다. 전자장비를 껐다면 식은땀 좀 흘렸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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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 하나면 고삐를 풀 수 있다. 일반도로에선 실수로 누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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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라-매틱' 8단 자동변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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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네슘 시프트패들

변속기는 ‘하이드라-매틱’이라고 불리는 자동 8단이 맞물렸다. 다단화 추세에도 뒤지지 않고, 마그네슘 시프트패들도 빠뜨리지 않았았다. 성능도 큰 불만이 없다. 다만 캐딜락의 자랑처럼 ‘번개같이 빠른 변속’까지는 잘 모르겠다. 꽉 막힌 출퇴근길 극저속 구간에서 간혹 변속 충격이 다가온다. 이 부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

사실 CTS-V의 폭발적인 힘을 경험하고 나면 변속기의 영민함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시속 몇 km로 달리고 있건, 기어가 어떤 단수에 물려있건 그저 밟으면 나간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힘 덕분에 답답할 겨를이 없다. 전자장비를 해제하고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 수준이 아니다. ‘쥬라기 공원을 탈출한 티라노사우르스’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지금껏 타본 차들 중 가장 인상적인 가속감을 보여줬던 차는 테슬라 90D였다. 2개의 모터가 4바퀴를 굴리는 90D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지만 너무 조용하고 매끈해 현실감이 없었다. 반면 CTS-V의 가속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우렁찬 V8 엔진음에 ‘위잉’하는 슈퍼차저 돌아가는 소리가 섞인다. 여기에 뒷바퀴가 헛도는 가속까지 더해지면서 훨씬 아날로그적이고 생생하다.

하체와 브레이크도 든든하다. 넘치는 힘 때문에 조금 과한 속도로 코너에 들어가도 롤링을 억제하며 끈적끈적 아스팔트를 물고 늘어진다. 넘치는 힘 때문에 뒤늦게 과속카메라를 발견해도 안정적으로 내리 꽂히며 부담 없이 속도를 줄일 수 있다. 넘칠 듯 찰랑거리는 힘이 쉽게 넘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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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륜 6피스톤 브렘보 브레이크

슈퍼세단 CTS-V는 앞에 ‘슈퍼’가 붙었음에도, 세단 신분임을 잊지 않았다. 드라이브 모드를 ‘투어’로 설정하면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 댐퍼에 들어있는 자성유체의 점도가 묽어지고, 엉덩이 친화적인 하체 움직임을 보인다. 기대보다 좋은 승차감 덕분에 뒷자리 아이들이 잠에서 깰까, 옆자리 배우자에게 타박 들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 화나는 일이 있다고 해서 가속페달을 까딱였단 가정폭력으로 신고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자.

단점도 있다. 앞범퍼 아래 달린 스플리터가 꽤 낮아 과속방지턱의 희생양이 되기 쉽다. 방지턱 앞에서는 충분히 속도를 줄였더라도 한 번 더 줄여야 한다. 사랑하는 애마의 턱을 보호하는 길이다. 혹시 700만 원짜리 ‘카본 파이버 패키지’라도 적용된 모델이라면 집에서 나설 때마다 10번씩 되뇌자. 카본 파이버 패키지를 선택하면 스플리터를 비롯해 보닛 통풍구, 스포일러, 디퓨저가 카본으로 바뀐다.

 

아메리칸 슈퍼세단 CTS-V

648마력의 CTS-V의 국내 가격은 1억 1,500만 원이다. 경쟁모델 메르세데스-AMG ‘E 63 4MATIC’은 1억 5,400만 원이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신형 BMW M5도 비슷한 가격표를 달고 나올 것으로 보인다. 출력은 두 모델 모두 600마력이 살짝 넘는 수준. CTS-V와 비교하면 약 4,000만 원이 비싸고, 40마력 가량 낮다.

차를 숫자만으로 판단하는 게 현명한 처사는 아니거니와 저마다 이름값에 어울리는 몸값을 책정했을 터. 그럼에도 CTS-V가 가진 미국산 대배기량 슈퍼차저 엔진의 매력과 ‘가격대 마력비’의 ‘혜자스러움’, 탄탄한 주행성능은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경쟁력을 지녔다.

잠시 생각해봤다. ‘만약 CTS-V가 내차여서 매일 몰고 다닌다면, 그래서 648마력에 익숙해진다면, 그다음엔 어떤 차를 타야 설레고 손에 땀이 날까? 무슨 차를 타도 재미없다면, 그것만큼 큰 재앙도 없지!’ 먼저 CTS-V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희박하고, 같은 출력이라도 차마다 다른 개성 때문에 절대 식상할 일 없다. 참으로 쓸데없는 고민이 아닐 수 없다.

CTS-V를 반납하고 돌아오는 길, 주차된 CTS를 만났다. 며칠 전까지 멋지다고 생각했던 CTS가 너무 얌전하고 싱거워 보였다. ‘V’ 뱃지의 마력은 사람을 이렇게 간사하게 만들었다.

 

이광환 carguy@carla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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